Page 298 - 중국현당대소설_배도임교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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9장  개혁과  풍자                     Reform  and  Satire












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문예학습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중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웨이쥔이      제12기(1956)   궈샤오촨        린모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국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현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당
                소설은  발표된  뒤에  매우  관심을  받았고  뜨거운  반응이  쏟아졌다.  어떤  공자  부문에서는  심지어  자신들에게  꿰어맞추기도       대
              했다.  『문예학습(文艺学习)』의  편집장  웨이쥔이(韦君宜,  1917-2002)가  솔선하여  이  소설에  대해  조직적으로  토론할  것을      소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설
              결정했다.  1956년  제12기부터  『문예학습』은  이  소설에  대한  평론을  4기에  걸쳐  게재했다.  받은  원고는  1300여  편이고,  그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|
              가운데서  앞뒤로  25편을  수록했으며,  문예계  인사,  당원기관  간부  등도  있었다.  일반적으로  대학생과  젊은  작가들은  소설에
              대해  긍정적인  태도를  지녔다.  뒤에  『광명일보(光明日报)』,  『중국청년보(中国青年报)』,  『옌허(延河)』  등  간행물에서도  토론       Chinese
              을  전개했다.
                1957년  1월,  중국작가협회  당조가  토론회를  구성했다.  시인  궈샤오촨(郭小川,  1919-1976),  문예  이론가  린모한(林默涵,
              1913-2008)  등이  참석했으며  소설에  독소가  있다고  여겼다.  어떤  사람은  1942년  4월에  옌안  『해방일보(解放日报)』  부간  Modern
              에  발표한  왕스웨이(王实味,  1906-1947)의  「들백합(野百合花)」에  견주어  거론하기도  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and






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Contermporary


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들백합(해방일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Novels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왕스웨이     문예부간  102기,   리시판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42년  3월)

                2월  9일,  리시판(李希凡,  1927-2018)이  『문회보』에  「『조직부에  새로  온  젊은이』를  평함(评『组织部新来的青年人』)」을
              발표해서  다른  단계로  토론을  밀고  나갔다.  그는  소설의  진실성에  대해  근본적인  부정을  하고,  관료주의에  대한  소설의  묘사
              는  현실을  왜곡했다고  공격하고,  그래서  베이징에는  근본적으로  관료주의는  없다고  말했다.  이런  소설에  관한  토론이  마오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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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     장    둥(毛泽东,  1893-1976)의  관심을  끌어냈다.  2월  16일부터  4월까지  마오쩌둥이  앞뒤로  이  소설에  대한  자신의  태도를  다
              섯  차례  밝혔다.  리시판의  이른바  ‘베이징에  관료주의란  없다’  하는  논조를  부정했고,  젊은  작가  왕멍을  ‘보호’할  것을  강조
         개
         혁    하며,  아울러  『인민문학』  편집부가  소설의  원고를  수정한  것에  대해  거세게  비난했다.  『인민일보』는  5월  8-10일에  내리  사
         과    흘  동안  『인민문학』  편집부가  소설을  수정할  적에  생긴  문제에  대한  문예계의  좌담을  게재하고,  또  『인민문학』  편집부가  수

         풍    정한  과정에  대해  상세히  설명했다.  마오쩌둥의  태도가  비판의  대상을  『인민문학』과  친자오양  쪽으로  바뀌게  해서  왕멍은  잠
         자    시  위기에서  벗어날  수  있었다.  하지만  1957년  11월에  그는  단  시위원회로  불려가  운동에  참여했고,  뒤에  ‘우파’가  되었으
              며,  그  소설도  당연하게  ‘독초’가  됐다.(对于该小说的讨论,引起了毛泽东的关注。自2月16日开始至4月,毛泽东先后五次表达
              了自己对于这篇小说的态度:否定李希凡所谓“北京没有官僚主义”的论调;强调“保护”青年作家王蒙;强烈批评『人民文学』编辑部
              对小说原稿的修改。『人民日报』5月8日至10日,连续三天刊登文学界关于『人民文学』编辑部修改小说时产生的问题的座谈,以及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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